또 다른 기적
https://www.youtube.com/watch?v=giYJ6dIy7xA
기적이란 초자연적인 현상을 당신은 믿고 있을까?
안타깝게도 신이란 믿고 있지 않던 종자라 이런 일이 당혹스럽기만 하다.
헤르먼 이스카넬은 온몸이 부유하듯 떠오르는 것을 느꼈다. 소란스러운 주변을 살펴보면 길거리가 온통 천으로 뒤덮여 돌아다니는 아이들로 가득하다. 그제야 웃음을 터트리고 마는 것이었다. 한 걸음 내디딜 때마다 희끄무레하던 발끝이 본래의 색으로 물들었다. 물론 손바닥을 펴 내밀면 지나가던 사람과 관통하여 현실감이 없었으나, 다채로운 활기로 가득한 마을 한복판을 걷고 있자면 즐거웠다. 거울에도 비치지 않으니 어떤 섬뜩한 모습일지 모르겠다는 불안감이 있었으나 어차피 보이지도 않는데 뭐 어떤가 싶었다. 잠시 고민하던 찰나, 그리운 얼굴들이 하나씩 떠올랐다.
‘깜짝 놀래켜 주면 좋겠다.’
속으로 떠올리자, 익숙한 듯 달라진 저택 앞으로 풍경이 바뀌어 간다. 어릴 때 한참을 울었던 복도와, 모든 정체성이 꺾여 나갔던 연회장을 지나 따스한 햇볕이 내리쬐던 정원으로 향한다. 바스락거리며 밟히는 풀잎이 발자국을 남긴다. 내가 여기에 있었다고, 여전히 당신을 걱정한다고. 헤르먼은 지친 얼굴로 잠든 불쑥 자라버린 여자아이의 얼굴을 눈에 담는다. 차마 닳을까 만지지는 못한 채 여전히 사랑하는 사람의 얼굴에서 과거의 흔적을 더듬었다.
“달리아, 내 아가씨는 여전히 씩씩하네.”
베니아가 아직 통할지는 모르겠지만 가까스로 머리카락을 쓰다듬으며 바란다. 오늘 밤에도 네게 좋은 꿈이 있기를. 꿈속에서만큼은 괴롭지 않기를.
익숙한 곳에서 세월의 흐름을 느끼고 생각보다 많은 시간이 지났음을 체감한다. 너무 먼 곳으로 여행을 떠났던 것일까. 이제는 돌아올 때가 된 거겠지. 여행자는 원래 그런 법이지 않나. 훌쩍 떠났다가도 집이라는 곳을 찾아 한참을 헤매며 그리워한다. 떨어지지 않는 발을 억지로 움직여 뒤돌아선다. 곁에 있다 보면 걱정하느라 한참을 떠나지 못할 테니까.
추억이 묻어있는 공간을 떠나 정신없이 달라진 세계를 구경하다 보면 어느새 해가 지고 있었다. 언제까지 이곳에 있을수 있을지 모르니 가벼운 발걸음으로 짓궂은 장난을 치러 뛰었다.
“에즈라~? 실례합니다. 네에, 들리진 않겠지만요.”
벌컥 저택의 대문을 열어젖히고 화들짝 놀라는 사람을 목격했다. 어라? 통과할 생각이었는데도. 헤르먼은 제 손을 바라보고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바람결에 열린 것처럼 슬그머니 문을 닫고 숨죽여 웃는다. 아마 내일쯤에는 아에티오스 백작가에 귀신이 들었다고 하지 않을까. 어쩐지 도둑이 된 심경으로 헤르먼은 살금살금 걸어 저택 내부를 누볐다.
살아있을 때도 이 정도로 깊이 들어온 적이 없는데. 새로운 섬의 개척자가 된 마음으로 한참을 기웃거리고 탐험했다. 문을 통과해서 집무실을 바라본다. 익숙한 필기체, 쌓아 올린 문서들. 네게 보냈던 편지들이 잘 도착했을까, 다소 걱정했으나 이 성격에 안 받았을 리가 없단 걸 안다. 선물들이 집안 곳곳에 있다는 걸 확인한 뒤에는 작게 중얼거리고 만다.
“어유, 솔직하지 못하기는 좋으면서.”
내가 없던 나날들과 마주하는 일은 즐거우면서도 서먹하다. 어쩐지 어색하기도 하다. 바보같은 에즈라, 꿋꿋하게 남아서 백작이 된 모습을 보아하니 상록수같이 곧던 성질머리가 어디 가지 않은 건 확실하다.
오랜만에 눈가에 열이 몰렸다. 선은 순환하고 세계는 바뀌지 않은 듯하나 착실하게 좋은 방향으로 나아가려 애를 쓴다. 이토록 아름다운 세계를 어떻게 사랑하지 않을 수 있을까. 내가 말했잖아. 내 죽음은 헛되지 않은 거라고. 앞으로도 그러겠지.
집무실 책상에 앉아 어느덧 캄캄해진 바깥을 한참이나 응시했다. 상념에 잠겨지나 가버린 시간들을 헤아리고 있으면 어느새 저택이 소란스러워진 걸 깨닫는다. 훌쩍 책상에서 내려와 사용인들의 틈바구니에 섞여 걷는다. 늦은 시각에야 돌아온 주인의 행방을 쫓아 걷다 보면 익숙한 듯 아닌 반가운 얼굴이 보인다. 여전히 피로해 보이지만 예전보다는 길을 확실히 찾은 고행자의 눈이 좋았다.
익숙하게 농담하며 주변을 빙글빙글 맴돈다.
“있잖아요, 에즈라. 저 그렇게 섬뜩한 칼은 또 처음 봤다니까요? 이야, 당신은 거기 올라가 볼 일이 없어서 다행인 거 같은데.”
대답이 돌아오지 않아도 한참을 그렇게 떠들었다. 그가 사용인에게 건네는 말에 대꾸하며 투덜거린다.
“애썼다고 말은 안 해요? 그렇게 부려 먹다 보면 사람들도 도망갈걸요. 아, 농담. 농담인 거 알죠?”
대문이 갑자기 열렸다 닫혔다는 말에 인상을 쓰는 모습에 크게 웃는다. 비현실적인 건 그의 베니아도 똑같을 텐데. 조금 골려줄까, 말까 고민하다 사용인이 받아 든 겉옷을 살짝 들어 보였다. 당사자만 파닥거리며 잠시 놀라는 모습을 보고 곧장 장난을 관두었다. 에즈라의 뒤를 따라 걸으며 방 안에 들어가는 걸 잠시 기다렸다.
“전 매너 있는 신사니까, 옷 갈아입을 때까지는 기다려준다고요. 그럼요, 심심해서 혼잣말하는 건... 큼. 아닌데요. 게다가 주인이 없는 방은 들어가지 않았어요. 기필코 맹세해요.”
눈을 한참이나 굴리다가 신나서 방 안으로 들어섰다.
“실례합니다. 네에, 어차피 에즈라는 보이지도 않잖아요.”
지친 표정으로 침대로 들어간 사람을 내려다본다. 시답지 않은 말을 내뱉고 그가 잠드는 모습을 지켜본 뒤에야 주변에 걸터앉는다.
“있잖아요. 저는 당신이 너무 걱정됐어요. 다른 사람들은 제가 도와줄 수 있지만 당신만큼은... 그럴 수 없었거든요. 유령이 되니까 다리가 아프지 않은 건 참 좋네요.”
이마에 손을 올리고 열이 나진 않을까, 악몽을 꾸진 않으려나 걱정한다. 부러질지언정 항상 올곧을 당신을 알았다.
“몸은 힘들어 보여도 나름대로 살아가는 모습이 보기 좋아요. 당신은 절 볼 수 없겠지만 저는 다시 우리가 마주할 수 있는 기회가 있어서 기뻐요. 오 년 뒤의 당신은 이렇게 생겼네요. 못 믿을 것 같아요. 과거의 저에게 말해준다면 거짓말하지 말라고 할걸요.”
이불을 끌어 올려 목 아래까지 덮어주고는 자장가를 흥얼거린다. 앞으로도 포기하지 않고 걸어갈 당신의 미래가 눈이 부셔서 어쩐지 눈물이 났다.
“아, 정말. 기쁜 날인데 주책맞게. 있잖아요. 제가 하고 싶은 말은요. 살아줘서 정말 고맙다는 거예요. 당신은 잘 웃어주진 않지만 다정한 사람이잖아요. 그런 당신이 참 좋았어요.”
눈물은 떨어지나 이불을 적시진 않는다. 달이 참 밝은 날이었다.
“오늘이요, 망자가 돌아오는 날이라고 하더라고요. 알고 있었어요? 에즈라, 나중에라도 말이죠. 저랑 있었던 시간이 즐거웠다고 해주지 않겠어요. 너무 깊이 생각하진 말고요. 가끔, 아주 조금씩만요. 제가 낼 수 있는 욕심이란 인제 와서는 그런 것들이니까. 그것만으로도 충분할 거 같아요.”
“우리 인사할까요. 안녕, 하고. 다만 확실한 건요. 당신이 저를 잊지 않는다면 내년에도, 그 이후에도 우린 다시 마주할 거예요.”
작은 인사를 건넨다. 찌푸리던 미간을 꾹 눌러 매만지고 숨을 참는다. 애정이란 이토록 큰 기적을 만들어내곤 했다. 당신을 통해 나를 바라본다. 길을 헤맬 때도 눈동자에 어린 다정함을 이정표에 더해 걸어간다. 사실 하늘에 떠 있는 별자리는 인연의 색채를 덧칠해 만든 팔레트가 아닐지 짐작한다. 그렇지 않고서야 이토록 빛날 리가 없지 않은가.
“안녕, 내 친구. 내년에 또 봐요.”
그림자가 걷히고 다시 밝은 빛이 창문에 어렸다. 조용히 열린 방문이 작은 소음을 만들어내고, 침묵이 내려앉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