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끄적끄적

*먼 훗날

 넓게 홀로 선 들판에서 아릿한 과거의 향이 났다. 그때에는 이곳이 나 홀로의 무대였건만, 그 수는 늘어 둘이 되었고 다시 수는 늘어 셋이 되었다.

 몸에 맞지 않는 것을 가두어 아파하던 아이를 떠올렸다. 처음, 마주쳤을 당시의 상황을 선명하게 기억하는 건 늙지 않는 영령의 특권. 사람은 점차 성장하며 망각이라는 축복을 거쳐 왔다. 다시 저 먼 별로 돌아간다면 분명 이 기억마저 사라졌겠지만 후회는 없었다. 그것으로 아이의 발판이 된다면 그것이야 말로 이곳에 소환되어진 자신의 의무였을 것이라.

 

 첫 장에는 이루고자 하는 열망으로 불타올랐다. 두 번째에는 처음 가져왔던 소망을 버리고 새로운 것을 찾아내었다. 마지막에는 오로지 존재한다는 사실만이 뇌리에 남았다. 배신하지 않는다는 사실, 배신당하지 않는다는 사실 하나. 더 이상 혼자가 아니라는 사실 둘. 결국 남겨질 사람은 아이라는 사실 셋.

 

 남겨진 사람은 왜 슬퍼하는 가. 그것은 거대한 문제였다.

 

 적어도 홀로 서기에 부족함이 없을 때까지만. 마지막 사라지는 순간에 이루어질 수 없는 소원을 빌었다. 영령으로서 갖기에는 작을 수 있다하지만 평범한 사람으로는 거대한 꿈. 그저 작은 베니면 되지 않을까. 네가 작았듯이 나는 한없이 작은 사람이 되고자 했다.

 천천히 발을 맞추어, 그래. 적어도 네가 나보다 커질 때까지 만이라도.

 

 수개월, 수년을 거쳐 언젠가는 커질 것이라고 생각했건만 멈춰있는 위인들과 다르게 현대를 살아가는 사람은 뒤따라 잡을수가 없었다.

 보호해야만 했던 아이는 어느새 커다랗게 자라서 어깨위에 저를 앉히고도 무거워하지 않았다. 동일하게 마주쳐오던 시선은 고개를 들어야 볼 수 있었다.

 

 “연진.”

 

 고연진. 손을 잡아주련. 이제는 커버린 작은 친우여, 손을 내밀어보련.

 아침 새가 우는 날에 함께 걷자꾸나.

 

 지는 해와 떠오르는 샛별은 언제나 다른 법이었다.

 분명 지금에서는 저보다 완벽한 형태의 사역마를 불러낼수도 있을 것이었다. 둘보다는 하나가 더 완벽한 법이지. 어른인 형태가 아닌 소년의 모습을 한 황제는 부족하다는 것을 베니는 알았다. 꼭 필요한가에 대한 효용성으로는 다들 ‘그렇지 않다.’라고 답할 시기가 찾아왔다는 것도.

 

 식은땀을 흘리며 누워있던 아이는 이제 이곳에 없었다. 조곤조곤하게 땀을 닦아주며 곁을 지키던 작은 황제가 느끼던 소소한 기쁨과 걱정은 과거 속에 남았다.

 손을 뻗으면 닿아오던 등도 지금에서야는 잡히지도 않았다. 훌쩍 커버린 제 친우가 자신을 기다려야 할 상황이 되었으니.

 

 엠프뢰르 데 프랑세즈, 프랑스인의 황제. 베니라는 이름과는 썩 어울리지 않았지.

 발목을 스치는 풀들이 간지러웠다. 불안감인가, 혹은 기대인가. 내가 느끼는 감정과는 무관하게 너는 언젠가 내 곁을 떠날 것이 아니냐.

 

 커다란 손바닥에 손을 올리고 걷던 나날의 풍경은 언제나 달랐다. 금빛으로 세상은 물들고 하얀 눈은 뺨을 상기시켰으며, 네가 빌었던 소원은 나의 세계를 다채롭게 물들였다. 그것 하나만은 달라지지 않았다.

 여전히 나는 궁금했다. 네가 만들어나가는 이야기의 끝이 어디로 향할 것인지. 힘겹게 달려간 끝에 아무것도 없다면 어떠한 기분을 느낄런지.

 

 노을이 지는 해질녘의 들판은 아름다웠고 깨어질듯 아슬아슬했다. 그보다 한걸음 먼저 걸어간 발걸음은 느려서 금방이라도 멈출 것 같았다. 영령은 과거에 멈춰선 자. 현대를 살아가기에는 적절하지 않았다.

 그러나 멈추고 싶지 않았다.

 먼 훗날 네 마지막을 지켜줄 사람이 없을지도 모른다는 불안이 멈출 수 없게 했다. 작은 손으로는 커다란 재물을, 야망을 쥐기에는 부족함이 있다 모두가 말하더라도 한때는 천하를 쥐었던 황제였다. 홀로 남겨지는 고독함은 누구보다 잘 알았으니.

 

 선명하게 밝은 머리카락이 바람에 날려 모자를 눌러썼다. 뒤를 돌아보는 순간에도 너의 모습을 그렸으니, 어떤 모습인가. 충만하게 차오르는 기쁨은 너에 대한 기대감이었다.

 

 "마지막까지 나와 함께 해주겠는가?" 

 

 이토록 자라난 아이에게, 더 이상 홀로 섬에 부족함은 없겠지만.

 

 역시, 끝에서도 함께하고 싶으니.

 

 네가 나를 알듯이, 나도 너를 알았다. 아직은 멀어질 때가 아닌 것 같구나. 조금 더 욕심을 내어 머무를 것이다.

 네 이야기가 끝이 날 때까지. 그 끝을 누군가는 기억해야 네가 서글프지 않겠나.

 이 또한 찰나의 순간일테니 지나가고 나면 하나의 꿈과도 같을 것이다.

 

 그러니 나는 이 순간에도 바란단다. 영원히 깨지 않을 꿈을 꾸리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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