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끄적끄적

안녕하세요, 여기는-.

* Some Sand (youtube.com)

 

 손을 뻗어봤자 달라지지 않는다. 짙은 무기력이 사람을 삼키는 순간, 홀로 어둠에 휩싸인 듯하다.

푸른 바다. 제 차원에 있던 바다와 대비되는 색의 조화. 이젠 바라보고 있으면 눈이 멀고 정신이 아득하게 가라앉는 기분이 든다. 잡았던 손, 그 손은 따뜻한 체온이 있었던 것 같았는데. 가라앉은 부유체는 찾을 수가 없고 영영 잃어버린 온기는 싸늘하게 식었다. 뜨거운 숨에 하얗게 수증기가 얼어붙어 하늘로 퍼졌다.

‘난, 여기서 뭘 하고 있는 거지?’

길게 늘어진 정장의 끝자락이 바람에 마음대로 흔들린다. 손가락이 곱아들고 서 있는 이곳이 어딘지조차 아득해질 무렵 떠오르는 얼굴들이 있다.

속에서부터 끓어오르는 응어리가 목 끝까지 차올랐다. 토해내고 싶었다. 손이 떨리고, 얼굴이 일그러지는 이런 감정을 뭐라고 하더라. 눈물은 나오지 않는데 코가 시큰거리고 얼굴이 뜨거웠다. 

카라얀은 신발을 아무렇게나 내던져 두고 물결을 따라 걸었다. 까끌까끌한 모래사장이 따갑다. 파도는 비와 함께 철썩이며 울렁였다. 다시 태어난다면 아무런 생각조차 없는 해초가 되어 떠다니는 게 좋겠어. 실없는 웃음이 잇새로 흘러나왔다. 모래사장을 따라 찍히는 발자국이 까맣게 물들었다. 걷는다는 건 언제나 흔적과 고통을 동반했다. 날카로운 돌에 패여 흘러나오는 까만 잉크는 파도에 씻겨 내려가며 모래사장 사이로 스며들었다. 

 


 

 후회만이 가득한 삶을 살면서도 죽음을 한 번도 떠올린 적이 없었다. 녹아드는 세상에 바퀴처럼 굴러갈지언정 당연하다는 듯이 충실하게 제 일을 할 뿐이었다.

카라얀에게 있어서 ‘익사’라는 것은 사전에서 말하듯 “액체가 폐포 및 기도로 흡입되어 질식하여 사망하는 것”으로, 단지 문장 그 이상과 이하도 될 수 없었다. 한 줌의 오래된 잉크에서부터 시작된 지성체. 세계가 부여한 역할에 맞춰서 살아가면 그만이었다. 

그러하므로, 깊게 파고 들어가려 하는 모든 흘러가는 생각 줄기를 차단하고 해맑게 웃을 수 있었다.

‘아, 고통스럽다!’

베어내면 내는 대로 비슷한 피가 흘렀다. 다른 사람과 비슷한 고통과 감정을 느꼈으나 되풀이되는 반복은 이내 모든 걸 무뎌지게 했다.

옆집에 사는 꼬마 아이 2 와 말썽쟁이 1이 말했다.

“작가 1. 뛰어서 죄송해요.”

“저도요.”

카라얀은 부드러운 미소를 띠며 응답하면 됐다.

“괜찮아. 그렇지만 저녁 늦게는 좀 조심해 주지 않겠어?”

아이들이 시끄럽게 뛰어 올라가고 나면 옆집의 노인이 휠체어를 끌고 다가온다. 백발의 노인은 나이와 걸맞지 않은 풍채로 카라얀에게 성큼성큼 다가왔다.

“그렇게 좋게만 말하면 못 알아먹는 다니까? 자네는 언젠가 뒤통수 크게 맞을 날이 올 거야.”

“아니에요. 아직 어린아이들이잖아요.”

“에잉. 쯧. 그래, 자네가 알아서 하겠지.”

노인이 지나간 뒤에는 아침 신문이 배달되고 해가 떠오른다. 완벽하게 짜 맞춰 굴러가는 하루. 집에 들어가 커피 한 잔과 함께 신문을 보고 있으면 밖에서 큰 소리가 들려왔다. 사람들의 비명소리. 경악과 탄식이 묻어나는 크게 울리는 사이렌.

“할아버지-! 할아버지, 정신 좀 차려봐요!”

노인의 사인(死因)은 이러하다. 아침 10시 30분. 심근경색으로 인한 발작. 목구멍을 타고 내려가는 커피의 역겨운 맛이 흐려진 정신을 일깨운다. 익숙한 죽음. 아이들이 올라갔던 위 층에서는 쿵쿵 울리는 소리가 끊이질 않았다. 변하지 않는 환경. 자리에 앉아 자판을 두드리고 있으면 물이 흘러 발바닥을 적셨다. 대체로 낡아빠진 맨션의 수도는 자주 샜다. 아무렇지 않게 가져다 둔 수건으로 구겨막고 카라얀은 다시 자판을 두드렸다.

 “난 이곳에서 빠져나가야겠어! 왜 대체 계속 반복되는 거지? 미쳐버리겠어.” 

소설 속 남자의 대사는 몇 번이고 써내려가 외운 참이었다. 토씨 한 자도 틀리지 않고 타이핑해 뽑아낸 뒤 출판사의 이메일로 원고를 전송했다. 처음에는 여러 내용을 바꿔가며 작성했으나 이젠 그러지 않았다. 

삭아 부스러진 조그만 나무 창틀 너머로 넘어오는 빛이 눈꺼풀을 덮었다. 거울을 쳐다보지 않아도 익숙한 얼굴 위에 감정이라고 불릴만한 게 떠올랐다. 불쾌감, 혐오, 이내 체념 어린 눈동자가 눈꺼풀 사이로 사라졌다. 문밖으로 나가 장을 보고 돌아와야 했으나 오늘만큼은 그러기 싫었다.

카라얀은 옷장 어딘가에 처박아 두었던 옷을 털어내 입고 현관 문 앞에 섰다. 술을 진탕 먹고 뻗어버리면 아무런 기억도 남아 있지 않겠지. 작년 겨울쯤, 비슷한 짓을 했다가 눈을 영영 뜨지 못할 줄 알았다. 생각보다 멀쩡한 뒤로부터는 기분이 더 나빠지기 전에 나사를 빼놨다. 모르는 게 약인 것도 있다니까. 

‘신사처럼 굴어 야지. 그래야 화내지 않을 테니까. 화내는 건 나만 피곤해질 뿐이야.’

길거리에 나선 뒤로는 정처 없이 걸었다. 한 손에는 독한 술을 들고 골목 사이로, 때론 강가에 다다랐다. 마지막에 기억나는 장소는 친구와 헤어졌던 장소였다. 둔탁한 고통과 함께 어둠이 찾아왔다.

눈을 뜨면 다시 반복이었다. 너덜너덜한 슬리퍼, 위층에서 울리는 뜀뛰는 소리. 시간이 필요하면 도로 눈을 감았다. 배는 아프기만 하고 아무런 감각이 없었다.

‘정말 싫다.’

외로움은 전반의 삶과 함께 하였으며 떨어져 나가지도 않았다. 언제쯤에 망할 산타클로스가 내 소원을 이루어줄까. 아니지, 난 어린아이가 아니니까 무시한 건가? 카라얀은 헛웃음을 짓고는 쉴 새 없이 흘러가는 망상 속에 팔을 들어 눈을 가렸다. 

‘아, 그만두고 싶다. 그럴 수가 없다.’

꿈속의 사내는 마냥 행복해 보였다. 처음 보는 사람과 인사하고 통명성을 한다. 파자마 파티를 하고 음식을 나눠 먹었으며, 걱정하나 없는 것처럼 웃었다. 그 모습이 부러워 다시 꿈속을 유영한다. 나에게도 기회가 찾아온다면 놓치지 않을 텐데. 

다시금 잠에 들었다. 깨지도 않은 깊은 잠을 자고 있는 동안에는 나름대로 행복할 수 있었다.

 


 

 처음에는 꿈을 꾸는 줄 알았다. 환상과 현실이 구분이 안돼서 이러는 건 아닌가 싶어 눈이 멀 정도로 빛이 나는 태양 아래 멀뚱히 서 있었다.

‘이게 꿈이었다면 차라리 좋았을 텐데.’

익숙한 고통과는 달랐다. 행복에 젖어들어 미래를 그리는 동안 끔찍한 고통이 찾아오리란 걸 모르고. 그전에 겪어왔던 무기력증과 우울을 넘어서는 고통이 있다는 사실을 왜 몰랐을까? 사람이란 이토록 멍청하다. 익숙해진 행복 속에 절여진 뒤에는 현실이란 게 늘 찾아오지만 견뎌내는 건 버겁다. 망각은 축복이란 말이 맞았다. 망각은, 유기체가 누릴 수 있는 영원하지 않은- 기억을 만들어주었다.

목적지 없이 걷기만 하던 발걸음을 멈췄다. 시간이 필요했다. 도망칠 곳이, 늘 그랬듯 회피하고 싶다면 잠에 들면 되는데 그럴 수 없었다. 카라얀은 홀린 듯이 바다를 응시했다. 

‘날씨가 추워서… 어떡하지.’

처음에는 영하로 내려간 온도가 모든 걸 얼려서 무자비한 바다가 그들을 데려가지 못하길 바랐다. 발을 적시는 물이 얼음장처럼 차가웠다. 바다가, 괴물이 데려간 사람들이 추위에 고통스러워했을까 두려워졌다. 카라얀은 계속해서 흐려지는 시야를 거칠게 문질러 닦아 냈다. 몰랐더라면 모를까, 났던 길은 모두가 알았다. 마음속에 난 빈자리가 쿡쿡 찔려 존재감을 과시한다.

너무 많은 자리가 비었다.

“미안해…”

더 잘해줄 걸 그랬나 봐.

사람은 끝없는 후회 속에도 살아간다. 카라얀은 며칠간 계속해서 접은 종이 배를 흘려보냈다. 

 

『안녕하세요, 여긴 등대입니다.

저는 카라얀이라고 해요. 새까만 얼굴을 하고 있고요. 눈은 새하얗습니다. 

정말로 사랑했던 친구들이 있습니다.

친구를 찾고 있어요. 안 보여서 다른 친구들이 걱정하고 있어요.

한 친구는 로봇인데, 유머 있고 재치 있는 친구예요. 느낌표가 있어서 알아보기 쉬울 거예요.

다른 사람은 아주 멋진 사람이에요. 강단 있고, 아주아주 똑똑해요. 아! 여성분이에요. 

그리고, 그리고… 나이를 많이 먹은 할아버지도 있어요. 최근 들어서 머리가 까매졌어요. 많이 추울까 봐 걱정이 돼요. 

그 외에도 손수건을 잃어버린 사람도 있고, 문어도 있고, 생김새가 다양해요. 그냥 등대에서 왔다고 하면 보시고 답장을 주세요.

안녕하세요, 여기는-. 

..

.

파자마 파티해요! 

저, 기다리고 있어요.』

ps. 긴급하게 답신 바랍니다! 늘 행복하세요.

 

늘 행복하길 바라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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